주위에 조금만 둘러보아도 일자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일때문에 자유롭게 공부를 못하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별로 힘을 (relatively) 드리지 않고 돈을 많이 받으면서 할 수 있는 career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한적은 드문거 같다. 오히려 안타깝게도 나의 학력이 올라갈수록 또 내가 가지고있는 기술의 수와 질이 늘어 갈수록 나의 일의 가치를 느끼기가 어려워 지는것 같다.
매번 KCM spring retreat에서 recreation 진행을 내가 맡았을때 했던 것이있다. 듣기라는 행위의 정의를 내리는것이였다. 진행의 원활함을 돕기위해 다음과 같이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고 있을때 “상대방의 말이 끝나면 뭐라고 답할까?”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있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위 정의 대로라면 사람 관계에서 가장어려운것이 있다면 서로의 생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논리를 따지고 있고 문법을 고치고 있으며 말이 끝나기도전 이렇게 반응해야지 하며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화중엔 내 자신에게 속으로 외치는 말이있다.
Shut up Tim! Shut up and LISTEN!
교회에서 임원회의를 할때엔 사용하는 내 노트북을 들여다보면 한 80%는 “Shut up Tim!”이란 문구로 가득 차여있다.
논리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고 그 생각을 나누는것을 즐겨하는 나에게는 듣기란 너무나도 힘이 많이드는 activity이다. 또한 나의 생각을 나누었을때 내가 듣는 일반적인 반응은 “또 논리 따진다”, “또 수학얘기한다.”, “너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있냐?” 등 부정적이였기 때문에 듣기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대화와 의견을 나눌때 사용할수 있는 개인적인 rule을 만들어 보았다.
First, just shut up.
Speak only when spoken to.
Even then it’s better to shut up.
If the urge to speak rises again, shut up.
Only talk if what they say contradicts with the Bible.
장난끼가 있는 리스트이지만 그래도 요즘 나의 social life를 잘 describe하고 있는거 같다.
그래도 내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몇안되지만 감사하게도 있다.
신앙(학?)에 관한 토론 - Sungjae Cho
논리적인 debate - John Lee
Technology/Video Game 이야이 - Amir Dastouri
Computer Science Talk - Eungyu Kim
일상 이야기 - Esther Kim
삶의 철학 - Heiwon Chung
위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편한것이 없다. 나의 생각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그리고 significant하게 들어준다. 나의 생각을 고치려 드려 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자신의 생각을 편히 나누어 준다.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상처받고 줄것이라는 생각 조차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과 이야기 할때는 Shut up이라는 주문을 외우지 않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왜 그럴까? 왜 어떤사람의 말은 들어 주는것이 쉽고 다른사람의 말은 듣는것이 힘들까?
나의 말을 골라가며 해야하며 듣고 있을때 judgmental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하는 사람들과위에 list한 사람들과는 무엇이 다른것일까?
내가 태어났던 그 날이 없었더라면,
‘아들을 가졌다’고 말하던 그 밤이 없었더라면!
그 날이 어둠에 가려 하나님께서 그 날을 찾지 않으시고,
빛도 그 날에 광채를 발하지 않았더라면.
일 년 중 그 날이 없었더라면,
어느 달에도 그 날이 없었더라면.
아, 그 밤에 아무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더라면,
그 밤에 기쁜 외침이 없었더라면.
나를 낳던 어머니의 자궁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내 눈이 슬픔을 보지 않았을 것을.
오! 내 분노와 내 모든 재앙을 저울에 한번 올려 봤으면.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텐데.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
견딘다고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내가 바위같이 강한가?
내 몸이 무슨 놋쇠인가?
나는 이제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네.
살아날 방법이 전혀 없어.
주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 생명이 너무 허무합니다.
내 눈은 이제 더 이상 기쁜 순간을 보지 못하겠지요?
나를 아는 사람이 이제 더 이상 날 보지 못하고,
주께서 나를 찾으시더라도 나는 이미 죽어 있을 것입니다.
구름이 사라지듯,
무덤에 내려가는 사람이 어찌 다시 살아나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다시 자기 집에 갈 수 있겠습니까?
집도 그를 다시는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잠잠할 수 있겠습니까?
내 영이 상하고,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슨 바다 괴물입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감시하십니까?
침대에 누우면 좀 편할까,
잠이라도 자면 고통을 잊을까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들을 통해서 두려워 떨게 하십니다.
이 몰골보다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혀 죽었으면 싶습니다.
사는 것도 싫고,
나는 영원히 살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내 날들은 한 숨 호흡이오니 내버려 두소서.
사람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소중히 여기십니까?
아침마다 살피시고, 순간마다 시험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침 삼킬 틈도 주지 않으십니까?
사람을 감시하시는 주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나를 표적으로 삼으십니까?
내가 당신께 무슨 짐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주님,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 잘못을 없애 주십시오.
이제 내가 흙 속에서 잠들 것인 그 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찾으셔도 나는 없을 것입니다.
- 욥 (3장 6장 7장, 쉬운 성경)
he had the guts to say it…
he was able to be totally naked and be vulnerable…
고등학교때 쓰다가 대학교때 그만둔 세벌식 자판을 무슨 노망이 들었는지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오타가 단어 하나 칠때 2~3번씩나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typing speed는 날 짜증나게한다. 마치 stick shift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생각이 난다. Every other stop sign에서 시동이 꺼질때 오는 frustration과 비슷한 경헝을 하고있다.
하지만 두벌식을 다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든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것처럼 무섭지만 그만큼 exciting한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익숙한 버릇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것을 습득했을때 오는 희열은 해본사람만 안다.
지난날 예전 것을 버리고 새로운것을 배운 예들을 생각해 보았다. Korean에서 English (1993), MS Windows에서 Gentoo Linux (1999), Automatic에서 Manual Stick (2003), SVN에서 git (2007), 그리고 가장 최근 두벌식에서 세벌식(2008)… 이와 같이 많은 새로운것을 습득한 transition들을 다시 생각해보니 재미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새로운것을 내 것 으로 만들기 위해선 먼저 예전것을 100% 버려야 한단 사실이다.
예전것을 버리지 않은상태에서 새것을 습득하는 것은, at least for me,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것, Windows와 같이 dual 부팅 하며 Linux를 배우는 것, 친구(John)차로 stick을 배우는것, svn을 사용하면서 git으로 전환하려는 것 모두 miserably fail했다.
또 안타까운 사실은 예전것을 버리는 행위를 나 혼자 내 의지만으로 해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매번 지난것을 버리는 행위는 외부적인 힘 혹은 어쩔수 없는 환경의 변화로 인해 가능케 됐었다. 오직 미국으로 이사 했을 때, Windows를 완전히 삭제했을 때, Automatic차(Red Buick)가 망가졌을 때, svn을 사용하는 project들이 없어졌을 때에서야 진실로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
새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의 지난날의 아직 버리지 못한 나의 감정들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곤 실망한다. 환경이 바껴야지만 새로 시작할수 있을까?
“한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는 부자였고 다른 하나는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사다가 키운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 양은 그의 자식들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같이 먹었고 그 잔에서 같이 마셨으며 그 품에서 잤습니다. 그 양은 그에게 마치 딸과 같았습니다. 하루는 부자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온 손님을 대접할 때 자기 소나 양을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그 새끼 양을 잡아 자기에게 온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 Nathan to David.
Maybe this story doesn’t apply 100% but nevertheless, it makes me think about where I am.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습니다.” - David’s reply.
It’s time for me to go back to the beginning and start all over.
오늘 교회 activity를 다 마치고 잠시나만이라도 나실이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집에돌아가면 벙어리인 마냥 아무말도 없이 저녁시간을 보내야하는 난 그냥 누군과 단둘이 마주 앉아 그냥 삶을 나눌 수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는것이 좋았다. (IM and phone doesn’t count)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서로 사는것이 생각만큼 재미없다는 약간 교회에서 누가들으면 놀랄만한 솔직한 감정을 나누었다. 나실은 일을 시작한뒤 그냥 payment내기 위해 돈을 버는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도 GWU에서 공부를 시작했을때에 초심과 재미를 잃었다고 나누었다.
그리곤 집에와 혼자 밥을 해 먹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 참 여유 없이 사는구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것도 아니다. 저번 학기에 놀랐는지, 공부도 미리미리 열심히 해놓고 해야할 일도 (물런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 돈관리 에선… ㅠㅠ) 꽤 organized되게 처리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시간이 많이 빈다. 6시~7시만 되면 집에 연구실에서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황금같은 시간에 밀렸던 game을 하고 영화간에 찾아가며 주위 전시회나 연극도 보러 다녔었을 텐데 요즘은 그러지 못한다. 그냥 집에와 밥을 먹곤 tv를 틀어논체로 잠에 들곤 한다.
마음적 여유가 없는것 같다.
…
보통때 같았으면 어떠한 witty한 analogy나 말씀을 통한 epiphany를 멋있게 적어 결론을 내야할 텐데 더이상 쓸 말이 없다.
매일 밤마다 나를 찾아주는 외로움이 싫다.
하루 일과를 마침과 함께 쏟아지는 허무함이 싫다.
이젠 나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는 dvd와 game이 싫다.
말씀을 읽어도 안식을 못찾는 내 자신이 싫다.
어지러운 방을 치우기가 싫다.
더이상 거짓말 하기 싫다.
그냥 다 싫다.